: 그건 전업 음악가에 대한 일종의 공포가 있다는 얘기처럼 들린다. 루시드 폴
: 있다. 심정적으로 나는 항상 전업 뮤지션이지만, 음악으로 먹고 사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있다. 개인적으로 집에 워낙 굴곡이 많아서, 너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내게는 그런 공포가 있다. 배고픈 게 싫다. 추운 것도 못 참고. 그래서 월급을 받을 수 있는 데에서 일하고 싶었다. 100만원도 좋고, 150만원도 좋으니까. 가족들 생활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일종의 트라우마가 있다. 다른 사람들처럼 용감하게 뛰쳐나가서 하고 싶은 걸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유학도 월급 주겠다는 이유 때문에 선택한 일이었고, 지금도 돈 주니까 하는 거다. 돈 안주면 내가 공부를 왜 하는가. 안 할 거다. 대신,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욕구는 정말 없다. 배만 안 고팠으면 좋겠다. 이런 말에 대해서 내가 약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나는 그렇다. 그건 다 인정한다. 그게 나니까. 그러면서 결혼까지? 말이 안되는 거다. 그런데 웃긴 건, 이제 나이를 좀 먹으니까 오히려 처음보다는 조금 더 용감해지는 것 같다. 더 겁을 내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못 먹고 살까라는 생각도 든다. (웃음) 이런 고민이 내가 선택해야할 시기와 맞물리면 좀 더 폭 넓게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솔직히 어떻게 할 지, 아직 결정을 못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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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루시드 폴│“나는 음악하는 사람이다. 한 번도 여기에 대해서 고민한 적이 없다”
매거진t|기사입력 2007-12-25 09:30 |최종수정2007-12-26 02:03
루시드 폴은 여러 가지 맥락에서 한국에서 흥미로운 음악가다. 홍대 앞 클럽을 중심으로 펑크 음악이 부흥하던 1990년대 중반, 서정성 짙은 기타 팝을 선보인 밴드 미선이의 멤버였던 그는 2001년 멤버들의 입대로 밴드가 잠정적으로 해체된 후 루시드 폴이란 이름으로 1집 <새>를 발표했다. 어쿠스틱 기타로 포크 음악을 선보이던 그는 2002년 <버스, 정류장> OST와 이소라의 , 유희열의 프로젝트 앨범 등에 참여한 후 돌연 유학을 떠났고, 유학 중이던 2005년에 발표한 2집 <오! 사랑>으로 2006년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팝싱글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7년, 그는 스위스화학회로부터 최우수논문상을 수여하며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고, 얼마 전에 3집 <국경의 밤>을 발표하며 광범위한 인기를 확인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루시드 폴은 인디 씬을 기반으로 대중적 지지를 획득한 보기 드문 음악가이자, 전문분야에서 실력을 공인받은 공학도이기도 하다. 혹자가 그를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라고 부르는 것과는 무관하게 과연, 그는 어느 경계에 서 있다. 조윤석, 혹은 루시드 폴을 만났다.
: 투표는 했나. (*인터뷰는 12월 20일 밤에 진행되었다) 민노당원으로 알고 있는데 이번 선거 결과를 보면 좀 복잡할 것 같다.
루시드 폴: 투표일 전에 귀국했는데 투표는 못했다. 주소지가 부산으로 되어 있어서. 집에 여러 가지로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굴곡이 많은 집안이라서 주소지가 왔다 갔다 한다. 민주노동당에는 2000년 총선부터 당원으로 가입해서 매월 당비를 조금씩 내고 있다. 그저 미미하게 서포트하는 입장인데, 그나마 여기에 없으니까 최근의 이런저런 소식에 대해서는 소문으로 들었다. 내부적인 얘기를 모르니까 혼란스럽긴 하다.
: 생각해보니 당신을 클럽에서 처음 봤던 게 10년 전이었다. 1998년의 어느 날이었는데.
루시드 폴: 나도 얼마 전에 생각해보고 깜짝 놀랐다. 만으로 9년, 햇수로 10년이더라. 외국에 나간 지도 벌써 5년이고. 그런데 나는 매년 겨울에는 한국에 들어왔으니 오랜만에 왔다고는 할 수 없다. (웃음) 지금은 왔다 갔다 하는 일에 많이 익숙해졌다. 한국에 오면 10분 만에 한국 모드가 된다. 그런데 작년 겨울에는 문득 답답해진 적이 있다. 무뎌진 건가, 란 생각이 들더라. 게다가 오면 서울에만 있으니까.
“상황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 그게 내가 지금까지 음악을 해 온 방식”
: 1집 <새>의 음악이 신선하게 들렸던 기억이 있다. 한없이 나른했지만.(웃음) 그 정도로 서정의 극단에 위치한 음악이 없었기 때문이다.
루시드 폴: 미선이에 있던 김정현이 카투사로 가고 나는 병역특례로 산업체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나는 사실 해체는 안 하고 싶었다. (웃음) 그런데 각자에게 음악의 무게랄까, 그런 게 다르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김정현은 제대하고 바로 유학을 갔고, 혼자 남은 나는 어떻게든 음악을 해야 하는데 기타를 드는 것 말고는 달리 선택할 게 없었다. 사실 미선이도 밴드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결과가 아니라 이것저것 다 해봐도 되는 게 없어서 선택한 것이었다. 상황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 생각해보면 그게 내가 지금까지 음악을 해 온 방식이었다.
: <버스, 정류장>은 반응도 좋았고, 평가도 좋았는데. 1년이 안되어서 갑자기 유학을 떠난 게 뜻밖이었다.
루시드 폴: 그 때 이야기가 많다. <버스, 정류장> 음반을 맡았을 때는 패배의식도 느꼈고, 절망을 많이 했다. 그 음반이 한 달에 만 장이 나갔다. 그런데 루시드 폴 1집은 1년 동안 만 장도 안 나간 상태라서. 그때 이런 상황에서 내가 음악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 회의가 들었다. 음악을 할 수 있나, 해도 되나,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마침 그 즈음에 라디오 뮤직과도 갈등이 생겼는데, 이게 심해져서 법적 문제로까지 비화된 상황이었다. 졸업도 해야 하는데, 개인적으로 안정적인 상태가 되고 싶었다. 장래에 대한 고민과 겹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에 우연히 스웨덴 대학 홈페이지에서 한국어로 된 박사 과정 모집 공고를 보게 되었다.
: 한국어 광고가 있었나?
루시드 폴: 거기에서 박사 과정에 있는 한국 사람이 낸 광고였다. 적당한 사람을 못구해서 그 광고가 1년째 걸려 있던 상황이었다. 다른 건 모르겠고, 내용을 보니 학비는 무료에 월 생활비와 숙식처까지 제공한다고 적혀있어서 바로 연락을 했다. 그랬더니 내 학부 학점을 물었다. 2.7이라고 했더니, 대체 왜 공부를 하고 싶냐고 하더라. 공부가 절박하냐고 묻길래 솔직하게 말했다. 원래는 음악 하는 사람인데 이러저러해서 거기로 가고 싶다고 했더니 담당교수가 못믿겠으니 일단 6개월짜리 임시 비자를 발급받고 와서 하는 걸 봐서 결정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당장 가서 6개월 동안 100페이지가 넘는 논문을 두 개 쓰고, 그 사이 소논문을 다 합해서 십여 편을 썼다. 아무 생각 안하고 공부만 했다. 그랬더니 그제서야 받아주더라.
: 유희열의 프로젝트 앨범에 참여한 것도 그 즈음이었고, 이소라를 비롯해 Hey와 김연우의 음반에도 곡을 준 게 그 즈음 아니었나.
루시드 폴: 이소라와는 별로 친하지는 않았는데, 내가 방송에 게스트로 나갔으니까. 오히려 토이뮤직과는 인연이 깊다. 나중에 들었지만, <음악도시>를 진행하던 유희열이 <버스, 정류장>을 듣고 토이뮤직의 정동인 대표에게 나를 추천했다고 하더라. 그 뒤로 대표가 몇 번 찾아왔는데, 그때마다 거절했다. 나름 메이저라는 생각으로 경계심이나 거부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라디오 뮤직과 상황이 복잡해지자 토이뮤직에서 그 문제를 다 해결해주고, 거기다가 언제라도 내가 좋을 때 음반 한 장만 내기로 계약만 하자는 제안을 한 게 솔깃하게 들렸다. 마침 유학을 결심한 때였는데 정동인 대표가 계약만 하고 가서 공부 할 거 다 하고 온 뒤에 내키면 한 장만 내자고 했다. 그래서 마음 놓고 떠날 수 있었다. 그 2년은 내게 음악의 공백기다.
: <오! 사랑>이 나오기까지 아무 소식도 못 들어서 의아하긴 했다. 얼마 전 스위스화학회에서 받은 최우수논문상으로도 화제가 되었는데.
루시드 폴: 스웨덴에서 공부하던 중에 <오! 사랑>을 발표했고, 그 때 공연 때문에 한국에 들렀다. 공연이 끝나고 돌아가서 다른 학교로 옮기겠다고 했더니 중간박사 학위를 따고 가라고 하더라. 스웨덴은 재미있는 게, 박사가 한 명 나오면 담당 교수에게 국가에서 격려금을 지급한다. 1억 원 정도다. 중간 박사 학위는 3천만 원 정도 나오는데, 담당 교수에 대한 예의일 것 같기도 해서 학위를 따고 학교를 옮겼다. 거기서 공부한, 아니 사실은 공부라고 하기가 애매하다. 나는 거기서 학생이지만 월급을 받는 연구원이니까. 그리고 공학연구라는 게 실험하고 그 결과를 정리하는 일이라서 공부라고 하기가 애매하다. 그냥 일인데, 그걸 계속 하다보니 그런 상도 받고.
“최소 비용 최고 효과 방식으로 음반 제작의 스타일을 바꿔야 한다”
: 그래서인가, <국경의 밤>에 수록된 ‘마음은 노을이 되어’에 대해서 누군가는 유학생 정서라고도 하더라. 루시드 폴의 정서는 일종의 노스탤지어인데 그런 정서는 <오! 사랑>과 <국경의 밤>에서 조금씩 바뀐 것 같다. 전에는 실연과 상처가 환기했다면 최근엔 다양한 관계가 등장하는 것 같다.
루시드 폴: 줄곧 거기에만 있던 건 아니지만 어쨌든, 5년이란 시간이 짧지 않으니까 나도 매년 생각이 바뀌고, 또 익숙해지기도 하는 것 같다. 복합적인데, <오! 사랑>이 전반기라면 <국경의 밤>은 후반기에 쓴 곡을 실었다. 가사에 있어서 변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던 앨범이 <오! 사랑>이라면 <국경의 밤>은 좀 자연스러워진 부분도 있다. 이별의 정서에 대해서는 고민이 많았다. <오! 사랑>을 작업할 때에는 일단 처음 음악 하는 사람들의 클리셰, ‘당신’이나 ‘상처’ 같은 내용을 반복하기 싫었는데, 그럼 뭘 할래? 라고 자문했을 때 가슴을 찌르는 게 없더라. 나도 감상에 빠져 있었구나라는 각성을 했고, 이걸 벗어나지 못하면 더 이상 음악을 못한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그 가능성을 본 게 <오!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더 넓히려고 한 게 <국경의 밤>이었는데, 이미 나는 거리를 둔 상태에서 폐부를 찌르는 이별의 아픔이 없는 상태에서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 향수라고 생각한다. 그건 어쩔 수 없다. 밖에 있는 동안 같이 음악 하던 친구가 세상을 떠났는데, 고향을 생각할수록 그 친구와 그때 이야기들이 그리워졌다. 말할 수 없이 그리워져서 향수도 향수지만, 이번 앨범에서는 친구에 대한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 그런데 이번 앨범에 대한 비판들 중에는 당신의 사회 참여적 가사라고 해야 할까, 그런 부분에 대한 내용도 존재한다. ‘사람이었네’같은 가사에 대해서 제 3세계 노동력에 대한 착취를 너무 감상적으로 풀었다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루시드 폴: 잘 모르겠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예전엔 ‘치질’이나 ‘송시’같은 곡에 대해서 스타일과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고 했지만 요즘에는 같은 이유로 비판하는 것 같다.
: 그것보다는 오히려 너무 세련되게 그려져서 그런 게 아닐까. 착취라는 문제를 세련되게 그려내는 건 그거대로 또 불편한 일이다. 그런데 이외에도 사람들은 당신에게 어떤 실망을, 이를테면 루시드 폴은 사랑이든 실연이든, 착취든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인데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닐까 싶었다.
루시드 폴: 어떤 사람들에게 루시드 폴은 많이 알려졌고, 소위 메이저로 올라간 음악인데, 그래서 이에 대한 정서적인 반발감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냥 싫은 거부감 같은 것. 그 이유를 찾다보면 유희열도 나오고, 함춘호도 나오고, 아무 상관없는 김동률도 나오는 게 아닐까. 특히 인디 씬에 애정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그런 반응을 들어서 많이 서운했고 상처도 많이 받았다. 그러면서 나도 뭔가 내 음악에 생명력이, 처음 데모를 만들던 그 때의 에너지가 없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국경의 밤>에서는 공연을 같이 하던 젊은 친구들과 작업도 하고, 어떤 건 데모를 그대로 써보기도 하면서 믹싱도 다른 사람에게서 찾아보면서 고민을 했다. 해답은 알 수 없지만 어떻게든 고민은 하고 있다. 그렇다고 정당화하려는 건 아니다. 정서적인 반감은 어쩔 수 없지, 인정할 수밖에 없기도 하고. 결국은 내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외연이 넓어지는 과정에서 생기는 충돌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 그러게, 당신은 어쨌든 지금 현재 ‘인기 뮤지션’이다.
루시드 폴: 대중음악가라면 누구나 많은 사람이 자기 음악을 듣기를 바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 때문에 뭔가를 잃지만 않는다면.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는, 뭔가 잃은 것도 없는 것 같고 타협한 것도 없는 것 같다. 순간순간 어쨌든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걸 다 해서 음반을 만들어 왔으니 음반이 많이 팔리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건 마냥 좋은 일이다. 정말 좋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만 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나가는 앨범 양이나 미선이 1집 앨범 양이 같다는 사실은, 지금 음반 시장이 죽어가고 있다는 얘기다. 어쩌면 나는 이런 상황과 별 상관이 없을지 모른다. 어떻게든 음악하며 먹고 살 수도 있을 거다. 문제는 이런 음반을 제작하는 사람들이나, 이제 막 시작하는 재능있는 뮤지션들이다. 그들은 어떻게 하나. 우리보다 100배 정도 재능이 많은 뮤지션들은 어쩌나. 이제는 이런 생각을 한다. 레이블이나 커뮤니티가 다 무의미해졌고 생존의 문제가 온다. 반응이 좋고 많이 나가니까 상대적으로 즐겁지만, 음악하는 사람들의 생존이 절대적으로 힘들어지니까, 되게 난감하다.
: 당신은 촉망받는 공학도이기도 하다. 그런데 생계가 절박하다는 게 선뜻 이해가 안 된다.
루시드 폴: 나는 음악하는 사람이다. 한 번도 여기에 대해서,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한 적이 없다. 열 몇 살 때부터 음악을 너무 하고 싶어 했고, 그런데 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되어서 혼자 꿈만 꾸고 연습하다가 대학에 들어와 이것저것 해도 안 되던 중에 미선이가 만들어진 거였다. 나는 어릴 때 밴드하면서 친구들과 같이 음악 듣던 사람들이 제일 부럽다. 그건 내게 없는 거니까. 그래서 내게 음악이란 그냥 해야 하는, 안 하면 안 되는 거다. 그런데 요즘에 음반을 만든다는 건, 퀄리티를 해치지 않는 정도를 고려하는 경제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 같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고의 효과를 내야하는 방식으로 음반 제작의 스타일을 바꿔야 한다. 대신 좋아진 건 뭘 내도 예전 같지 않기 때문에 리스크에 대한 부담은 오히려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인디나 메이저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도 그런 이유인 것 같고. 영리한 프로듀서가 되거나, 필요한 상황이다.
“음악으로 먹고 사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있다”
: 이번 앨범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오! 사랑>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얘기도 한다. 루시드 폴의 음악은 큰 변화가 없는 음악이라서 관심이 없다는 사람들도 있고.
루시드 폴: 그런데 달라져서 안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보면 다 다른 기준이 있는 거 아닐까. 개인적으로는 음악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들이 스타일에만 빠져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 사람의 음반에 다양한 스타일이 종합선물세트처럼 들어가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어떤 사람은 평생 파두만 하고, 어떤 가수는 평생 엠뻬데(주: MPB-Musica Popular Brasileira-브라질 대중음악)중에서도 발라드만 하는 사람이 있다. 레이 마뚜 같은 사람이 R&B나 모던 록을 하지는 않는다. 분명히 그런 변화들도 의미가 있겠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특별히 이번엔 이런 형식을 시도하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전체적인 질감을 어떻게 가져갈 건가가 고민이다. 더 심심하게 기타 하나로 갈 수도 있고,
: 미선이와 루시드 폴에서의 질감의 차이는 밴드와 솔로의 차이 때문인 것 같다. 보수언론을 비판한 ‘치질’이나 전과자를 얘기한 ‘송시’는 거창하게 사회적인 문제의식을 논한 게 아니라 이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보려는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밴드 구성에서 그런 노래가 나왔기 때문에 그런 질감이 나왔던 것 같다는 뜻이다.
루시드 폴: 아까 말했듯이 나는 내가 의도한 게 아니라 내게 허용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을 해온 것이다. 그래서 내 노래에는 의도한 것보다 우연의 효과가 더 크다. 1998년 당시 녹음실의 사운드 상태라든가, 당시의 내 연주실력이나 가사, 좋아하던 리버브의 양과 엔지니어의 스킬 같은 게 섞여서 미선이의 이 나왔고, 2007년에는 또 그래서 달라진 거라고 생각한다.
: 박사 과정은 언제 끝나나. 그땐 또 선택의 고민이 있을텐데.
루시드 폴: 내년 5월에 끝난다. 그때는 분명히 고민이 될 것 같다. 그런데 계속 공부를 할 것인지 아닌지는 아닐 것 같다. 지금 하고 있는 건 공부가 아니라 일이다. 실험을 하고 그 결과를 내는 일이니까. 어쨌든 시작은 했으니 최선을 다해서 마무리를 지을 거다. 사실 그 다음에는 조금 더 자유로워질 것 같기도 하다. 이 쪽 일을 하기 전에 나는 공학에 대한 환상 같은 것도 있었는데, 한 5년 정도 하면서 그런 게 없어졌으니까. 완전히 그만두고 전혀 다른 생업을 찾아 갈 수도 있다. 내게 음악은 업이지만, 먹고 사는 건 다른 일이다.
: 그건 전업 음악가에 대한 일종의 공포가 있다는 얘기처럼 들린다.
루시드 폴: 있다. 심정적으로 나는 항상 전업 뮤지션이지만, 음악으로 먹고 사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있다. 개인적으로 집에 워낙 굴곡이 많아서, 너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내게는 그런 공포가 있다. 배고픈 게 싫다. 추운 것도 못 참고. 그래서 월급을 받을 수 있는 데에서 일하고 싶었다. 100만원도 좋고, 150만원도 좋으니까. 가족들 생활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일종의 트라우마가 있다. 다른 사람들처럼 용감하게 뛰쳐나가서 하고 싶은 걸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유학도 월급 주겠다는 이유 때문에 선택한 일이었고, 지금도 돈 주니까 하는 거다. 돈 안주면 내가 공부를 왜 하는가. 안 할 거다. 대신,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욕구는 정말 없다. 배만 안 고팠으면 좋겠다. 이런 말에 대해서 내가 약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나는 그렇다. 그건 다 인정한다. 그게 나니까. 그러면서 결혼까지? 말이 안되는 거다. 그런데 웃긴 건, 이제 나이를 좀 먹으니까 오히려 처음보다는 조금 더 용감해지는 것 같다. 더 겁을 내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못 먹고 살까라는 생각도 든다. (웃음) 이런 고민이 내가 선택해야할 시기와 맞물리면 좀 더 폭 넓게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솔직히 어떻게 할 지, 아직 결정을 못 내렸다.
: 어쨌든 박사 과정을 끝내고 돌아오면 ‘공학박사 출신 음악가’라는 타이틀이 생기겠다. (웃음)
루시드 폴: 하춘화 씨처럼 되는 거다. (웃음) 뭐, 공학박사 출신의 포크 뮤지션이라면 홍보하긴 좋지 않을까. 사실 5월에 끝나도 바로 돌아오지는 못할 거다. 왜냐면 월급이 나오기 때문에, 일단 일을 좀 해줘야 한다. (웃음) 다음 앨범 생각은 이제 막 시작했는데,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라는 텍스쳐의 문제에 대해서는 고민 중이다. 대신 새 앨범 작업을 시작하면 이번엔 좀 빨라지지 않을까싶다. 물론 이제 막 3집이 나왔는데 이런 얘길 벌써 하면 좀 그렇지만. 아마도 내년 말이나 내후년 초에 새 앨범 작업을 하지 않을까. 물론 막상 이렇게 얘기해놓고 못 지키면 너무 무책임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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